전란에서 백성을 구한 구황작물 고구마, 서애 유성룡

전란에서 백성을 구한 구황작물 고구마, 서애 유성룡

조진태 / 전임기자


전란에서 백성을 구한 구황작물 고구마, 서애 유성룡


 

임진왜란, 사이다와 고구마 이야기 셋 - 그 중 세 번째

 


 

임진란 7년 전쟁의 마지막 날인 무술년 11월 19일, 문관과 무관의 중심에 서서 전란을 극복한 두 주역이 현실 정치에서 사라집니다. 

 

선조를 떠난 이순신과 유성룡

 

19일 새벽 여명 무렵, 남해 관음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된새바람을 뜨겁게 달군 시뻘건 불기등과, 총포와 조총이 뿜어내는 화약 연기 속을 비집고 날아온 적탄에 맞아 전사합니다. 그리고 7년 전란을 진두지휘한 영의정 서애 유성룡이 사헌부, 사간원의 지칠 줄 모르는 탄핵을 받고 파직됩니다.


군왕 선조는 이날 전란 내내 자신이 그토록 부담스러워하던 두 신하를 떠나보냅니다. 아마 고구마로 메인 가슴이 뚫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다 정치를 해보이겠다고 다짐했는지 모르지만, 7년 전란에 허덕이던 백성을 살린 구황작물은 이순신과 유성룡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석영 최광수가 제작한 유성룡 표준영정[국립현대미술관], 

[CC BY-NC-SA 2.0 KR 의 이용규칙에 따라 사용함]

 

당시 유성룡의 삭탈관작을 요구하는 탄핵 상소는 산더미같이 쌓였는데요, 전란 중에도 조정 여론이 이렇게 일치단결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모든 언론이 오로지 유성룡을 겨냥해 십자포화를 쏟아내고, 이를 지지하는 댓글 테러가 포털을 채웁니다. 그 골자는 이렇습니다.


'파당을 만들고, 왜적과 화친했으며, 유명무실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고, 안동의 기름진 땅은 모조리 수탈한 탐관오리'라는 죄명입니다. 선조실록에는 '글을 배운 자치고, 유성룡에게 침을 뱉지 않는 이가 없다'고 버젓이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유본좌, 욕 마렵다…’라는 댓글에 ‘사이다’라는 공감이 쏟아지는 형국입니다.

 

여론에 묵묵했던 지도자

 

서애는 여론을 뒤집으려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습니다. 글 솜씨가 부족할 리 없습니다. 기축옥사(1589년) 당시 저잣거리에서 한동안 회자될 만큼 명문의 상소를 올려, 여론을 단번에 뒤집은 선생이 이번에는 묵묵히 사직을 청합니다. 궁궐을 나선 유성룡은 목멱산 자락 묵사동의 살림을 정리하고, 여기저기 손을 벌려 길양식을 꾸어가면서 안동으로 향합니다. 어째 탐관오리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의 행랑에는 아마 생전에 이순신이 보낸 남해안 유자 서너 개가 묵은 향기를 내며 소중히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상처를 다시 파헤치는 작업, 징비록 집필 구상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낙향한 뒤 궁상맞게 살던 그는 1601년, 선비가 스스로 그 명예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염근 청백리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리고 1604년 선조가 임진왜란의 공신들을 회맹제에 초대했을 때에도 ‘두문불출’로 일관하며, 공신의 초상을 그리는 화사에게는 '세운 공이 없다'면서 발걸음을 돌려 세우고 징비록 집필에 전념합니다.


‘징비록’은 "나는 조심스레 스스로를 삼간다"는 시경 주송의 소비편으로 시작해, 전사한 이순신의 생애를 압축한 추모의 글로 매듭됩니다. 서애 선생은 "장군이 있을 때, 왜군은 한산진을 감히 범할 생각조차 못했다. 장수와 병사들은 그를 군신으로 받들고 단합했다"고 그 행적을 역사의 가르침으로 기록합니다. 고구마 같은 친구, 이순신을 알아본 한 고구마 재상의 절절한 그리움이 느껴집니다,


저술을 마친 유성룡은 안동하회마을을 떠나, 산간 오지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를 짓고, 초동과 더불어 희희낙락 상수리를 줍고 장작불을 지피며 모진 삶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휴식기를 가진 뒤, 1607년 5월 6일, 자신의 말 그대로 안정을 취해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자식들에게는 "사람이 욕심에 빠지면 염치를 잃는다. 자신이 취한 곳에 만족하면 어느 곳이든 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탐관오리 누명은 벗겨졌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1607년 5월 13일, 천릿길 안동에서 서애의 부음이 전해진 한양성, 백성들이 시전의 문을 걸어 닫습니다. 새벽부터 목멱산 북쪽 묵사동의 폐허가 된 집터에 가난한 백성들의 발걸음이 구름을 이룹니다. 상가는 천리 밖에 떨어져 있었지만, 영정도 없이 지방만이 놓인 노지(露地)에 각 관청의 늙은 아전과 서리 등이 곡식과 베를 내고, 신료들이 거들면서 빈소가 하나 더 마련됩니다.

 

‘유명무실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는 한 노 재상의 부음을 접한 백성의 반응은 서럽고, 뜨겁습니다. 선조실록은 이를 조선조 최초의 자발적인 '백성장'으로 기록하는데요, ‘침을 뱉지 않을 수 없다’는 구절과 묘하게 상충됩니다. 이제 정치 역정을 들여다 볼 차례입니다.

 

합리적인 현실주의자 서애

 

정치 지도자로서의 서애는 합리적인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는 동인에 몸담았지만, 때로 파당의 논리를 뛰어넘었습니다. 서인 정철은 임진란 발발 4년 전 기축옥사를 주도하면서, 동인과 무고한 백성 수천여명을 학살합니다. 모반을 꾀한 정여립을 아는 자, 그 아는 자와 한 동네에 사는 자를 아는 자, 등이 모두 학살됩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놓고, 동인이 서인을 일거에 쓸어버릴 정치적 기회를 맞았지만 유성룡이 생뚱맞게 서인 편을 들면서 무산됩니다. 이때부터 동인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인은 유성룡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남인을 서인보다 더 증오했으며 끝끝내 유성룡 탄핵을 주도합니다. 자신이 속한 파당을 떠나 때로 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될 수 있는지 지금도 미지수입니다.

 

전란 기간 체찰사와 영의정 등 요직을 맡았던 유성룡은 늘 전투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전란이 터지자 평양과 의주를 오가며 명나라 참전을 이끌어 내었고, 임진년 7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의 군대가 평양성 회복 작전을 전개할 때도 고질병인 치질로 엉거주춤 말을 타고 이들의 병참과 기동 지원을 맡습니다.

 

전란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 초 평양성 수복 작전을 주도한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조명연합 사령부를 지휘하고, 명나라 군대가 살얼음이 떠다니는 임진강을 건널 때 백성들과 함께 부교를 만들고, 임진강 동파역에 최전선 사령부를 꾸립니다.

 

명나라 총병 사대수는 왜군 자객을 우려해 개성으로 사령부를 옮기라고 사정하다 결국 명나라 군사 수십 명을 호위병으로 붙어줄 지경이었는데요, 정유재란 당시 한양이 다시 함락될 것을 우려해 가솔을 서둘러 피란시킨 신료들은 이후 유성룡을 '화친론자'로 몰아 탄핵합니다. 


당시 선조 또한 비빈을 평양성에 피신시키고,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하삼도에 내려간 유성룡 핑계를 댑니다. 그가 한양 가솔을 북방으로 피란시켜, ‘나도 그랬다’고 천연덕스럽게 답합니다. 하지만 유성룡 가솔은 묵사동에 멀쩡히 살고 있어, 선조는 ‘한번 웃어 넘기자’고 사과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힘겨운 현실을 외면하고, 넘치는 사이다 글재주로 무능과 게으름을 덮어버린 정치인들이 사후 백성장을 받을 리 만무합니다.

 

백성의 아픔 뼈저리게 공감한 지도자

 

그는 전란에 고통받는 백성의 아픔을 뼈저리게 공감한 지도자입니다. 백성을 노역에 동원하면서 매번 공명첩을 빼곡하게 만들어 이들의 공과를 기록해서 훗날의 보상을 약속하면서도, 군량을 빼돌린 정주 판관은 곤장으로 다스립니다.

 

또 명나라 총병 사대수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이를 품에 품고 오자,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음을 터뜨리고, 세곡선을 세워 솔잎가루를 빻아 섞은 쌀가루 물을 임진강가에서 백성들에게 나누기도 하는데요, 쌀가루가 부족해 초조해진 유성룡에게 명나라 총병은 자신의 군량 30석을 빼내 보탭니다. 그 진심에 감동한 것이지요. 또 포로로 잡혀 왜군에게 부역한 백성들의 생명도 함부로 다루지 않아, 그중 옥에서 풀려 나온 군기시 장인 대풍손은 훈련도감의 화약 제조에 정성을 다합니다. 모든 정치인이 백성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정치인이 백성을 위하는지 백성들은 결국 알게 될 것입니다.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탄핵상소들

 

이런 재상에게 왜 전란의 막바지에 탄핵 상소가 빗발쳤을까요, 그 비밀은 다음에 있습니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으로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계사년(1593년)과 병'신년(1596년) 동안 서애는 개혁정책을 쏟아내는데요, 이것이 중앙 관료들의 이권을 건드리고, 신분제도를 흔들면서 미운털이 집중적으로 박힙니다.

 

계사년 4월 한양성에 입성한 명나라 군대가 진군을 멈추자 유성룡이 몸져누운 시기,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유성룡을 찾아, '조선이 아파 대인마저 병들었다'면서 조선 병사의 훈련과 진법 훈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유성룡은 조선의 직업군인 양성기관인 훈련도감을 태동시켰고, 그해 가을 도제조를 맡아 신분을 초월한 군관의 양성을 시도하는데요, 노비의 무과시험을 밀어붙이면서 노비와 토지를 기반으로 문벌의 부를 지탱하던 사대부들의 공적으로 떠오릅니다.이때 사대부들은 노비는 애초부터 지모가 부족하게 태어나, 군관이나 지휘관이 될 수 없다는 상소문을 시시덕거리며 서로 돌려가며 읽고 있었습니다. ‘사이다 상소’라는 것이지요.

 

제도 개혁은 최종적으로 부패의 온상이었던 공납제도를 향합니다.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이 아닌 쌀이나 곡식으로 바꾸어 받는 작미법을 들고 나와 벼슬아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입니다. 농어민들은 자신이 바치는 계절, 지역별 특산물에 대해 관청에서 '품질이 낮다'고 시비 걸어 퇴짜 놓으면, 멀쩡한 제 물건을 두고, 시세의 서너 배를 주고 방납(防納)업자의 물품을 구입해야했는데요, 이는 지방과 중앙 관리, 방납업자까지 치밀하게 짜여진 체계적인 비리구조였고, 백성 살림과 국가 재정을 파탄시켰습니다.

 

제도가 시행되자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은 작미법으로 종이가 올라오지 않아 상소를 못 올린다는 고발장을 연일 써대면서 유성룡을 괴롭힙니다. 유성룡은 이때 전국의 군역 수와 불합리한 세제를 통계 수치로 정리한 뒤, ‘백성들은 지금 진흙탕에서 그것도 거꾸로 매달려 살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한산도의 살림살이와 군세, 기상 변화를 매일매일 기록한 이순신과 참 많은 공통점을 보이는 지도자입니다. 정치인들은 늘 백성을 사랑한다지만, 자신의 이권만은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거나, ‘어떻게’ 라는 대안이 없다면 모두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사이다 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지요.


자신의 살점마저 내어준 지도자

 

결국 전란 기간 내내 그가 황소처럼 걸어온 길이 탄핵 사유로 둔갑하자, 전란의 마지막 날 자신의 ‘살점’마저 내어 줍니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묘역이 있는데요, 마을 입구의 수동교회를 지나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한 좁은 농로를 올라가면, 자그마한 공터가 나옵니다. 서너 대의 차량을 세울 정도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서애 선생의 넓은 인품이 느껴집니다. 조선조 최초의 백성장을 받은 선생의 묘소는 쓸쓸하고 보기에 따라 초라합니다.

 

 

안동시 풍산읍 소재 유성룡 선생의 묘역[사진=조진태]  

 

지난 여름 야트막한 둔덕을 올라 찾은 묘소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생전의 청백리 서애 선생을 닮았고, 스스로를 먼저 삼가는 징비록의 정신을 연상시킵니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 묵묵히 제 직분을 끝까지 다하는 것, 징비록을 읽는 모든 이들이 자칫 잊기 쉬운 징비록의 고구마 정신입니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무술년 12월 낙향길, 서애 선생이 전란 당시 투구를 쓰고 달리던 경기도 대탄에 이르러 남긴 시 한수를 소개합니다.

 

전원으로 가는 길

벼슬아치 생활, 40년

천변에 말을 멈추고 돌아보니,

한양성 기색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 조진태, ‘징비록 - 종군기자의 시각으로 회고한 유성룡의 7년 전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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