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노동운동의 성인, 세자르 차베스의 몰락과 침묵의 이면(1)
FEATURE
영웅의 이면 — 전설이 무너지던 날
미국 노동운동의 성인(聖人) 세자르 차베스, 수십 년의 침묵이 깨지다
2026년 3월 21일 | 청원닷컴
1993년 4월 29일, 캘리포니아 델라노. 관 주위로 5만 명이 모였다. 단순한 장례식이 아니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미국 농장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해낸 한 사람을 위한 조문 행렬이었다. 참가자들은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왔다. 멕시코계 미국인들은 눈물을 흘렸고, 노동운동가들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국 역사상 어떤 노동운동 지도자의 장례식보다도 많은 사람이 모인 날이었다. 세자르 차베스. 그는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2026년 3월 18일, 뉴욕타임스의 탐사보도 한 편이 그 신화를 산산조각 냈다.
한국인들에게 세자르 차베스는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한국의 노동운동가들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전태일 열사가 1970년 평화시장의 재봉틀 소리 속에서 불길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차베스는 1960년대 캘리포니아 포도밭의 먼지 속에서 맨몸으로 싸웠다. 두 사람 모두 착취당하는 이들의 편에 섰고, 두 사람 모두 그 시대를 바꿨다. 그리고 이제, 차베스의 이름 앞에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쌓이고 있다.
I. 포도밭에서 온 소년
이야기는 1927년 3월 31일, 애리조나 주 유마에서 시작한다. 세자르 에스트라다 차베스는 중산층 멕시코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1880년대에 직접 개간한 땅에 지은 집, 식료품 가게, 정비소, 당구장. 차베스 가족의 삶은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은행은 가족의 땅을 빼앗았고, 세자르가 열 살이 되던 1937년, 차베스 일가는 짐을 꾸려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300만 이주 행렬에 합류했다. 나중에 차베스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뒤에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닭도, 소도, 말도, 농기구도. 아버지 가족의 것도, 어머니 가족의 것도. 전부.
이주노동자의 삶이 시작됐다. 세자르는 캘리포니아 전역의 농장을 떠돌며 포도를 따고, 면화를 수확하고, 사탕무를 뽑았다. 학교는 37개를 다녔다.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에 또 다른 농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8학년, 중학교 졸업이 그의 마지막 학력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밭으로 나갔다.
「밭을 갈고, 과일을 수확하고, 채소를 길러 여러분의 식탁을 풍요롭게 채우는 사람들에게 정작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세자르 차베스
그가 직접 목격한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당시 미국의 농장 노동자들은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지 못했다. 시간당 40센트를 받으며 일했고, 실업보험도 없었다. 밭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짧은 자루 괭이로 허리를 구부린 채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살충제는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뿌려졌다. 자녀들은 밭에 함께 나와 일했다. 그것이 미국 농업의 현실이었다.
II. 캘리포니아 포도밭의 현실 — 그것이 '아메리칸 디너 테이블'의 비밀
잠시 차베스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미국 농장 노동의 현실을 들여다보자.
미국에는 현재 약 290만 명의 농업 노동자가 있다. 이들이 없으면 미국인의 식탁은 텅 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전체 과일, 견과류, 채소의 절반 가까이를 생산하는데, 그 일을 하는 손들의 73%가 외국에서 태어난 이주자들이다. 그리고 그 중 약 50%는 합법적인 취업 자격이 없는 비서류 이주자들이다.
이들의 연간 중위 소득은 2만~2만5천 달러. 한화로 연간 2,700만~3,400만 원이다. 미국 전체 임금 노동자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21%는 공식적인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다. 농장 노동자들은 연방 산업 안전보건국(OSHA)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미국 내 유일한 업종 중 하나다.
살충제 문제는 지금도 심각하다. 미국에서는 매년 약 9억 킬로그램의 농약이 사용된다. 미국 환경보호청(EPA) 추산으로는 매년 약 30만 명의 농장 노동자가 농약 중독 증상을 경험한다.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도 약 40만 명의 어린이가 미국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 위기는 이 고통을 더 깊게 만들고 있다. 미국 이민 위원회의 한 연구에 따르면 H-2A 비자 노동자의 13.7%가 섭씨 32도 이상의 환경에서 일해야 하며, 남부 주 노동자 4명 중 1명이 폭염 속에서 일한다. 폭염으로 인한 신장질환, 열사병은 점점 흔한 직업병이 되어가고 있다.
차베스가 싸웠던 현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싸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이해해야만, 그 싸움이 '침묵'이라는 이름의 공모로 얼마나 쉽게 오염될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III. 라 카우사(La Causa) — 대의를 위한 투쟁
1944년, 차베스는 해군에 입대했다. 2년 뒤 제대해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 1948년, 헬렌 파벨라와 결혼해 8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를 바꾼 것은 1952년에 만난 한 사람이었다. 사회운동가 프레드 로스. 로스는 맨 땅에서 사람들을 조직하는 법을 가르쳤다. 차베스는 빠르게 배웠다. 1958년, 그는 캘리포니아 지역사회 서비스 기구(CSO)의 전국 이사가 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1962년, 차베스는 농장 노동자만을 위한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꿈을 위해 CSO를 사임했다. 아내 헬렌이 생계를 위해 밭에 나가는 동안, 차베스는 저금했던 1,200달러를 털어 델라노로 이사해 동료 돌로레스 우에르타와 함께 전국 농장 노동자 협회(NFWA)를 창설했다. '노동조합'이라는 말 대신 '운동(movement)'이라고 불렀다. 두려워 할 이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3년은 조용했다. 차베스는 위장을 위해 인구조사를 한다고 말하며 센트럴 밸리 농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조직했다. 실업급여, 아내의 밭일 임금, 지지자들의 기부로 근근이 버텼다.
전환점은 1965년 9월에 찾아왔다. 필리핀계 농장 노동자들이 포도 재배업자들을 상대로 파업에 돌입했다. NFWA는 합류를 결정했다. '델라노 포도 파업'의 시작이었다.
「우리 이주는 우리 대의의 성냥불이 될 것입니다. 농장 노동자들이여, 일어서십시오! 역사는 우리 편입니다. 비바 라 카우사!(Viva La Causa! — 대의여, 만세!)」
파업은 5년 동안 이어졌다. 차베스는 1966년 델라노에서 새크라멘토까지 500킬로미터를 행진했다. 25일 단식. 전국적인 포도 불매운동.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현장을 찾아왔다. 미국인들이 마트에서 캘리포니아 포도를 카트에서 꺼내 내려놓기 시작했다. 1970년, 포도 재배업자들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임금 인상, 농약 안전 기준, 의료보험 기여. 노동자들의 승리였다.
그 과정에서 NFWA는 다른 농업 노동자 조직과 합병해 전국 농장 노동자 연합(UFW)이 됐다. 1975년에는 차베스의 오랜 투쟁 끝에 제리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캘리포니아 농업 노동 관계법(ALRA)에 서명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장 노동자들에게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법이 탄생했다.
차베스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을 사숙했다. 비폭력 원칙은 신앙에 가까웠다. 1988년에는 포도 농장의 농약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36일간 단식했다. 단식을 끝낼 때 마틴 루터 킹의 아들이 그 옆에 앉아 있었다.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사망한 지 1년이 넘은 차베스에게 미국 최고의 민간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추서했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등 여러 주에서 그의 생일인 3월 31일이 공휴일로 지정됐다. 전국 수백 곳의 학교, 도서관, 공원, 도로가 그의 이름을 달았다. 해군 보급함에는 'USNS 세자르 차베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살아있는 성인(聖人)이 되었다.
IV. '나의 침묵은 여기서 끝납니다' — 60년이 지나서야
2026년 3월 18일 수요일 아침,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에 긴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수년에 걸친 탐사보도의 결과물이었다. 기자들은 60명 이상의 전직 고위 참모, 노조원, 가족을 인터뷰했다. 수백 페이지의 노조 기록, 기밀 이메일, 사진, 당시 녹음 파일을 검토했다.
그리고 그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차베스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동안, 여성과 소녀들을 자신의 성적 욕구를 위해 이용했다고.
기사의 첫 번째 증언자는 아나 무르기아, 현재 66세. 그녀는 여덟 살 때부터 차베스를 알았다. 아버지가 UFW의 오랜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그녀가 열세 살이던 때 자신의 사무실에서 처음 성추행을 시작했다. 차베스는 당시 마흔다섯 살이었다. 피해는 그녀가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차베스는 그녀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질투할 것'이라는 말로 입을 막았다.
두 번째 증언자는 데브라 로하스, 역시 현재 66세. 그녀 역시 운동가 집안의 딸이었다. 로하스가 열두 살이었을 때, 무르기아가 당했던 것과 같은 사무실에서 처음 신체 접촉을 당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차베스는 수주간에 걸친 캘리포니아 행진 도중 그녀를 모텔에 머물게 했다. 그곳에서 강간이 일어났다. 당시 그녀는 처녀였다. 차베스는 그녀에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아홉 살이었을 때부터, 우리가 함께할 운명임을 알았다.'
두 여성은 수십 년간 우울증, 공황 발작, 약물 남용에 시달렸다. 침묵의 무게는 그토록 무거웠다.
「나는 이 비밀을 충분히 오래 간직했습니다. 나의 침묵은 여기서 끝납니다.」 — 돌로레스 우에르타, 95세
그러나 기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름은 따로 있었다. 돌로레스 우에르타, 95세. 차베스의 UFW 공동 창립자. 라틴계 노동·시민권 운동의 또 다른 거인. '시 세 푸에데(Sí, se puede, 네, 할 수 있습니다)라는 구호를 만들어낸 여성.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 구호를 'Yes, we can'으로 빌려쓰며 유명해진 바로 그 말의 원작자.
우에르타는 1960년대에 두 번의 성폭력을 당했다고 밝혔다. 첫 번째는 강압과 조종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조종당하고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상사이자 내가 이미 인생의 수년을 헌신한 운동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나는 거절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두 번째는 완전히 강제적이었다. 1966년, 델라노의 포도밭 한 가운데 세워진 차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강제로, 내 의지에 반해, 함정에 빠진 것 같은 환경에서 당했습니다.'
두 번의 만남 모두 임신으로 이어졌다. 우에르타는 임신 사실을 심지어 차베스에게도 숨겼다. 헐렁한 옷으로 배를 가렸다. 아이가 태어나자 더 안정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 키움을 맡겼다. 그 아이들은 올해, 수십 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게 됐다.
60년간의 침묵. 왜였을까. 우에르타는 답했다. '나는 그 운동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지켰습니다. 노동조합의 형성이 그 권리들을 획득하고 지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고, 나는 세자르 그 누구도 그것을 막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대의가 개인의 고통을 덮었다. 운동이 피해를 침묵시켰다. 그것은 우에르타 혼자의 선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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