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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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김현 / 객원기자(전문기고인)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 작품은 몇 번을 읽었다. 그 때마다 새록새록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뻐근해지기도 하는 깊은 여운을 주는 책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년시절의 기억이나 가족의 의미, 시대의 변화에 따른 개인 삶의 굴곡 등이 더 가깝게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인가 싶다.


박적골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은 온통 포근함과 생동감, 살아있음 그 자체다. 작가는 이 때를 ‘야성의 시기’라 이름붙였다. 산과 들, 실개천, 소나기, 심지어 뒷간까지 흥미진진한 놀이터가 되었으니 야성의 시기라는 제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실개천에서 펄떡거리는 보리새우를 잡으면 바로 저녁거리가 되고 풀각시 시집보내기, 소나기는 하늘에서만 내리는게 아니라 앞에서 무리지어 달려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호들갑스럽게 늘어놓는 것에서 작가가 이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뒷간에서 똥누기 놀이하는 장면은 요즘 아이들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별나라 이야기일 것이다.


국민학교 때 – 그 때는 그렇게 불렀다 – 나도 방학마다 할머니 댁에 놀러갔던 추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할머니 댁은 당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섬마을이었는데 그 땐 엄마의 등쌀에 떠밀리듯 갔지만 사실 난 할머니 댁에 가길 좋아하지 않았다. 제일 큰 이유는 변소 때문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 곳과 비슷했다.

 

박완서 작가 [사진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964650&memberNo=39777151,  CC BY-NC-SA 2.0 KR 사용규칙에 따름]

 

 

한쪽에 두엄더미와 똥을 긁어모으는 손잡이 달린 큰 나무판자가 있었고 어른 발 서너 배쯤 되는 널빤지 두 쪽에 간신이 발을 얹고 쪼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 내가 누운 똥이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구덩이가 얕았다. 그곳에 우글대는 꾸물꾸물한 구더기들이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찌푸려진다. 개학할 때 쯤 집에 돌아오면 머리에는 허연 서캐들이 득실거렸던 것도 내가 시골집을 싫어했던 이유였다.


겨울방학 때 작가는 시골 아이들에게 으스대고 싶어서 타지도 못하는 스케이트를 가지고 갔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겨울에는 논바닥이 모두 얼음이라 아이들 놀이터로는 그만이다. 삼촌은 나에게 칼날 두 개를 판자에 이어붙인 미끄럼틀을 만들어 주었지만 나는 스케이트라는 도시의 문명을 자랑하고 싶었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사실 나는 탈 줄도 몰랐을 뿐더러 논바닥 얼음이라는 곳이 군데군데 벼 벤 자리가 뭉툭하게 올라와 있어 스케이트가 날렵하게 나가기는 애당초 어려운 곳이다. 작가와 똑같은 경험을 한 것이 신기롭고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제일 크게 웃음지은 부분이었다.


주전부리 귀하던 시절에 엿이며 강정이며 구운 은행들을 광에 숨겨 놓고 고모들 모르게 슬쩍 집어주시던 할머니가 나도 있었다. 큰 손녀라고 어지간히 예뻐하셨는데 난 할머니가 창피하고 싫었다.


할머니는 눈썹이 거의 없어서 성냥을 그어 훅 불어 끄고는 그 시커먼 성냥 학으로 눈썹을 그리곤 했는데 그런 날은 일년에 한 두 번 마을에 박수무당이 굿하러 오는 날이었다. 동네 여자들은 단장하고 굿판에 모여 한 바탕 떠들며 먹고 마시고 했던 날, 어린 마음에 무서웠고 학교에서 배운대로 ‘이건 미신이야 미신타파’ 하며 맘속으로 시골의 무지함을 비아냥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여름이면 할머니가 새하얗게 한복을 차려입고 어디론가 가셨는데 내가 포도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반나절이나 걸리는 곳으로 포도를 사러 가셨던 것이다. 지금도 포도로 유명한 그곳은 마을 어디나 포도밭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해풍을 더 받는 곳의 포도가 맛있다며 굳이 먼 걸음을 하셨다. 그 먼데서 포도 한 상자를 사서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양산을 받쳐 들고 기쁘게 걸어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거의 반 상자는 먹어치운것 같다.


그런 할머니에게 나는 모질게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고운 말 한 마디 안한 것 같다. 엄마 아빠의 불화의 원인이 할머니에게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두고 두고 맘에 걸렸는지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손주들 중에 제일 크게 운 것이 나였다.


어릴 적 시골경험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지 그 땐 몰랐다.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오래된 사진첩처럼 소설이 내게 유년의 따뜻했던 그림들을 한 장씩 꺼내보게 해주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또 다른 나다. 딸이 그런 것처럼, 박완서 작가의 엄마는 강인한 여성이다. 시어머니의 잔소리쯤은 끄떡도 안할 만큼 자존심 세고 아이에게 허락도 안 받고 머리를 빗기다가 싹둑 잘라낼 만큼 강단 있는 사람이다. 아이에게 잔뜩 공부시켜 소학교를 합격시켜 놓고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까짓 소학교 누가 못 붙냐고 눙쳐댈 만큼 체면도 중시하고 뿌리 없는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등 꼿꼿한 양반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큰 며느리로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시댁 식구들을 물리치고 아이들을 서울로 데려와 갖은 고생을 하며 교육을 시키는 교육열 강한 엄마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강남 엄마, 기러기 아빠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교육열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제일 큰 기둥은 엄마였다.


나의 엄마도 자존심 세고 생활력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다지 교육열이 높았던 것 같지는 않다. 엄마의 성장 자체가 불우했고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자식교육에 대한 지침을 갖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그저 자식들이 공부 잘해주면 좋다 하는 정도였다.


젊었을 때부터 엄마는 미용 일을 했었고 나와 동생은 그 덕을 자주 보았다. 당시로서는 제법 비싼 청 자켓과 바지를 양장점에 데리고 가 한 벌로 맞추어 주기도 하고 소풍이나 운동회 등 학교 행사가 있는 날에는 고대기를 연탄불에 달구어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기도 했다. 친한 친구는 지금도 가끔씩 말한다. “넌 공주로 컸어”라고. 가난했지만 아이들을 나를 부자라고 여긴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바위처럼 단단한 작가의 엄마에게 아들은 아주 특별한 존재다. 작가의 오빠는 엄마나 작가와는 딴 판으로 섬세하고 소심하며 효심이 지극한 귀한 아들이자 장손이었다.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할 만큼 저항의식도 있었고 총명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어서 모든 가족들은 오빠에 대한 기대가 컸고 오빠는 이에 부응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없는 엄마에게 오빠는 아들 그 이상이었다.


이런 오빠를 전쟁이 망가뜨렸다. 좌익과 우익, 인민군과 국군이 뒤엉킨 시절, 오빠는 의용군에 끌려갔고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 오빠는 피해망상, 불안, 초조에 시달렸고 염치없는 사람처럼 떼를 쓰기도 하고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 대목에서 번번이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엄마에게 아들이란 존재가 어떤 것인지, 또 귀하게 장성한 아들이 망가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 나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쟁이 사람을 벌레로 만든다고 한다. 존엄성은 사라지고 굴욕과 야만과 상처만이 남는다. 인간은 없고 광풍만 있다. 휩쓸리지 않을 재주가 없는 무지막지한 바람이다. 눈을 뜰 새도 없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끌려 다니다 패대기쳐지는 게 전쟁이다.


삼촌이 총살당하고 오빠가 폐인이 되고 가족은 해체되었다. 결국 오빠도 죽게 된다. 작가가 전쟁이라면 몸서리를 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당시 확고부동한 좌, 우익이 얼마나 되었을까? 극소수 지배자들? 아니 그들도 신념보다는 저들의 집권과 이익을 위해 깃발의 색깔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세계 곳곳은 전쟁 중이고 우리도 여전히 휴전 상태일 뿐이다. 언제든지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이 인간이 아닌 벌레의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냐고.


박적골에서의 행복하고 팔딱거리는 유년 시절부터 일제 수탈과 2차대전, 6.25로 이어지는 암울하고 비참했던 전쟁의 시절까지, 작가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민낯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그 기억과 분노를 언젠가 글로 남기리라 다짐한다. 실제로 전쟁의 비극을 작품에서 자주 그려냈다.


그것이 작가가 그 시절 짓밟혔던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법이고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전반부가 작가의 어린 시절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싱아를 따 먹었을 때의 새콤달콤한 맛이라면, 후반부는 서울에서 처음 맛본 비릿한 아카시아의 맛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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