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이중 스파이 - 가르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이중 스파이 - 가르보

청원닷컴 / 청원닷컴 편집인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던 날, 독일의 주력부대는 노르망디가 아닌 파 드 칼레(Pas de Calais)에서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한 후에도 두 달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것이 독일의 패전을 빠르게 앞당겼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당시 독일군에게는 크게 신뢰할만한 스파이가 있었습니다. 알라릭(Alaric)이라는 코드명을 가진 이 스파이는 상륙작전이 개시되던 날, 독일 사령부에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과 관련한 제법 상세한 정보를 보내줍니다. 그럼에도 독일 사령부의 시선은 여전히 노르망디가 아닌 ‘파 드 칼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기 전, 독일 역시 조만간 연합군으로부터 대규모의 공세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알라릭에게 연합군의 동태를 주시해 보고하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언제, 어디로 상륙할 것인지가 독일 사령부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도버해협의 길이는 34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가장 최우선의 선택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노르망디는 도버해협에 비해 거리도 멀고 지형상의 여건도 불리해 상륙작전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이 않았습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죠. 독일군은 확실한 정보를 알아내고자 합니다. 알라릭은 1944년 1월부터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까지 무려 500건 이상의 정보를 무선으로 독일 사령부에 알립니다. 하루 20건 이상 보고한 날도 있었습니다.


알라릭은 상륙작전이 있던 전날밤인 5일과 6일 사이에 자신이 관리하는 하부조직에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임을 독일측 무선 오퍼레이터에게 미리 알립니다. 하지만 6일 오전 3시, 알라릭이 무선신호를 보냈을 때, 독일측 오퍼레이터가 이를 받지 않았습니다. 무선통신은 오전 8시가 되어서야 전달됐습니다. 알라릭은 크게 화를 냅니다.

 

“이 일은 변명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무감만 아니라면, 이 일을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알라릭이 오전 8시에 독일측에 전달한 정보는 꽤 상세한 것이었음에도 정보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정보의 가치는 전달된 시각에 좌우됩니다. 이미 상륙이 시작된 마당에 독일 측이 알고 있더라도 대응이 어려운 시각에 도착한 것이죠.


이보다 앞서 오전 3시에 전달하려던 정보의 양은 이보다 더 적었습니다. 때마침 독일 오퍼레이터가 수신을 하지 않자, 알라릭은 오전 8시까지 5시간 동안 몇가지 세세한 정보를 더하여 보고합니다. 그 시간동안 정보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것들 뿐이었습니다.


사실 알라릭은 이중스파이였습니다. 독일측에서 그의 코드명은 알라릭이었고, 영국측에서 그의 코드명은 가르보였습니다. 코드명 알라릭이 이날 보낸 정보는 영국측이 독일측에게 상륙지역을 속이기 위한 작전명 ‘포티튜드’의 수행과정이었습니다.


그동안 코드명 알라릭은 독일 사령부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아왔습니다. 그는 1944년 7월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기도 합니다. 이는 최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한 공적이 있으면서 히틀러의 승인이 있는 경우에 수여되는 훈장입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알라릭이 독일측에 전달한 정보들은 다양하고 세세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필요한 것들이었고, 정작 유용한 정보들은 시간을 살짝 넘긴 것들이었습니다. 시간을 넘긴 정보들은 가치가 높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독일측에서는 이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르보의 계략이었던 것입니다.


1942년 11월 북 아프리카 지역에서 작전명 토치(Torch)가 시작되기 전, 리버 클라이드(River Clyde)에 있던 알라릭의 하부조직이 독일 사령부에 항공우편을 통해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 내용은 한 무리의 군함과 전함이 페인트로 위장한 상태로 항구에서 출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이 우편에는 출항 전 날짜로 된 소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보기관이 이 우편물의 배달을 늦춰버립니다. 우편물을 받았을 때에는 이미 정보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후였습니다. 하지만 독일 사령부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우편물을 너무 늦게 받아서 안타깝다. 하지만 당신의 보고는 매우 훌륭했다.”


알라릭의 정보는 항상 이런 식이었습니다. 허구로 만들진 가짜 정보도들도 많았습니다. 혹은 허구와 진짜가 애매하게 뒤섞여서, 독일 정보국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내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만드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때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간첩망 조직을 구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는 영국으로 가지 않고 리스본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마치 영국에 있는 것처럼 속이면서 영국에 관한 가짜정보를 독일 정보국에 보냅니다. 그는 여행 안내서나 열차 시각표, 영화관련 소식, 혹은 잡지의 광고 등을 이용해 그럴듯한 가짜정보를 만들어 냅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약간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당시 영국의 1 파운드는 20실링, 1 실링은 12펜스로 십진법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숫자에 약한 그가 비용의 총액을 계산하는데 곤란함을 겪었다고 합니다. 영국이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몰라, 실수를 할 뻔 했다고도 합니다.


나중에 영국에 돌아온 그는 27명으로 구성된 간첩망을 조직합니다. 간첩망의 코드명은 아라발(Arabal)이었습니다. 아라발은 독일 정보국에 끊임없이 정보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 27명의 스파이 중에 실재하는 인물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알라릭이 만들어낸 허구의 간첩망이었으니까요.


꼭 필요했던 정보가 뒤늦게 도착해 쓸모없이 되었던 어느 날엔가 독일 사령부는 알라릭을 질책합니다. 요긴했던 정보를 너무 늦게 보냈다고 말이죠. 그러자 알라릭은 아라발 조직원 중 한 명이 정보를 보내기 직전 병이 났었다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보고를 합니다. 그러자 독일 사령부는 사망한 스파이 부인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합니다. 물론 그 스파이는 실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스페인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호안 푸홀 가르시아(Joan Pujol Garcia)입니다. 그는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정치적 극단주의에 회의를 느낍니다. 2차 세계대전 중 그는 처음 마드리드 주재 영국 대사관에 접촉해 스파이 역할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신분을 위조해 열렬한 나치지지자로 위장합니다. 그리고는 독일의 첩보기관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일 스파이의 지위를 확보한 후 다시 영국 첩보기관과 접촉해 정식으로 이중 스파이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즉 작전명 오버로드(Overload)를 성공시키기 위한 전단계 작전인 포티튜드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연합군이 노르망이에 상륙한 후 두 달이 지나도록, 독일 사령부가 이를 일종의 위장상륙으로 간주하고 ‘파 드 칼레’를 고수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그의 역할이 컸습니다.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영국왕실로부터 대영제국훈장(Member of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영국과 독일, 양쪽 모두로부터 훈장을 받은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후 그는 잔존하는 나치 조직으로부터 살해당할 것을 우려합니다. 그는 영국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아 앙골라로 여행을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합니다. 물론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분을 위장해 조용히 베네수엘라의 라구니야스(Lagunillas)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책방과 기프트샵을 운영하다가 1988년에 생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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