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평전』을 읽고

백재선 기자의 책읽기 산책

『다산 정약용 평전』을 읽고

백재선 / 전임기자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에 실학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실학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다산은 약관의 나이에도 학문이 뛰어나 정조 임금의 신임을 받아 형조 참의의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젊은 시절 한때 서학에 빠지고 주변 친지들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이유로 극심한 탄압과 견제를 받았다. 결국 짧은 기간의 관직에서 내려와 오랜 귀양살이를 겪는 형극의 길을 걸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부단한 노력으로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게 됐다.


시중에 나와 있는 대표적인 다산 평전은 다산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과 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책이다.


다산 연구의 권위자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 정약용 평전』에서 유년 시절에서부터 삶을 마무리할 때까지 일대기를 평전으로 엮었다.


박이사장은 당시 조선 성리학이 세상을 구제할 논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패와 타락을 가속화시키는 상황에서 다산은 孔孟의 사상과 철학을 민중의 논리로 재해석하여 진보적인 경학으로 발전시켰다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평가를 언급하면서 다산의 학문적 성과에 큰 의미를 두고 평전을 썼다고 밝혔다.


다산은  1表(경세유표)와 2 書22(목민심서, 흠흠신서)의 저술을 통해 국가의 행정제도와 문물제도 개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다산은 修己와 治人이라는 두 축을 바탕으로 삼아 학문체계를 세우며, 修己가 本이고 治人이 末이라 하여 본말이 함께 연구되고 실천되어야 한다고 했다.


박이사장은 “인간 다산에게 배울 점은 힘들고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언제나 자신을 채찍질하여 학문을 연구하는데 온갖 정신을 다 바친 점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금장태 교수는 『백성을 사랑한 지성』이라는 제목으로 다산 평전을 썼다. 그동안 다산의 생애와 인물을 해명하는 여러 저서를 저술해온 금교수는 다산과 마주하고 함께 걸으며 다산을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평전을 저술했다.


금교수도 다산의 일대기를 청년 시절, 관직 활동, 유배 생활, 노년의 여유 시대로 구분해 정리하고 다산의 학풍과 예술에 대해 별도로 다뤘다.


금교수는 평전에서 다산을 지성인이자 사회운동가로 높게 평가했다.


다산은 세계질서와 인간존재의 의미를 비추면서 유교 경전을 해석해 방대한 체계를 이루어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부패한 관료의 착취로 고통 속에 허덕이는 민생을 직시하고 누적된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구체적 방책을 제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금교수는 “다산은 광범한 영역에서 관습적 고정 관념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야를 열어갔던 시대의 선구자였다”라면서 “그의 실학 정신이 그 시대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다음 시대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었던 선구자로서의 위치는 확고하다”고 강조했다.


이들 책은 다산의 삶과 학문적 성취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 내용 위주로 이뤄져 평론의 성격을 띠는 평전이라기보다 위대한 위인의 전기를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랫동안 다산을 연구해온 저자들로서는 다산의 생애와 정신에 대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그 내용을 상세히 전달하고 싶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개인적으로 다산 평전을 읽고 난 소감을 정리해본다.


무엇보다도 먼저 오랫동안 억압과 핍박 속에서 연구와 학문 활동을 지속하면서 經典과 經世學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 선생에 대해 마음속에 우러나는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고 근본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본 윤리인 孝悌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라면서 이론이 아닌 실천을 중시했다. 그가 언급한 治人之學의 經世學도 당시 고리타분하게 이론에 몰두한 전통 유학자들과 달리 시대를 앞서서 보다 나은 사회 건설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학문하는 데 있어 공평함을 중시하면서도 자기 주관을 갖고 새로운 이론과 사상 체계를 제시했다. 현장에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실천적 지식인이자 실용주의자이었다.


또한 다산이 존경스러운 부분은 매상에 열린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과 교류를 해온 점이다.


평전을 보게 되면 다산은 젊었을 때부터 주자학 이론을 달리하는 다른 당파 사람들과 교류했고 유배 기간에는 현지 평민 자제들과 주변의 학승들과 스스럼없이 교류하는 등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가 18년의 오랜 유배 생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기게 된 것도 주위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교류를 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유배에서 해제되어 말년을 고향에서 지낼 때도 아들 나이의 추사 김정희 등 당대의 젊은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저작을 보완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다음으로 본받아야 할 점은 매사를 철저히 기록하는 다산의 자세와 태도이다.


다산은 공직생활이나 유배 생활에서 겪은 모든 일에 대해 소감을 정리하여 글로 남겼다. 사실 우리가 다산의 사상과 삶에 대해서 온전히 알게 된 것도 그의 기록물과 저작물 덕분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2,500수의 시를 후세에 남겼다.


그는 자신이 방문했던 지역이나 만났던 사람들의 인상에 대해 짧은 시로 남겼다. 그의 시는 당시 양반들이 즐겨 썼던 吟風弄月풍의 시가 아니라 사회와 현실을 매섭게 비판한 참여시에서 더욱 빛났다. 그의 시 덕분에 우리는 당시 백성들이 처한 현실과 위태로운 나라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산 자신이 형극의 시대를 살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인간애를 베푼 점도 본받아야 할 것 같다.


다산이 신유사옥(1801년) 때 천주교 신자인 형 정약종과의 관계를 추궁받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엄중한 처벌을 받더라도 형님의 죄상을 증언할 수 없다면서 인륜의 도리를 다한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다산의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인간애는 그가 유배 기간 중 자녀들과 부인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세상을 떠난 친구들, 서모, 며느리, 어린 딸을 위해 직접 쓴 묘비명에서 절절히 잘 드러난다.


다산이 스스로가 쓴 글(변방사동부승지소)에서 새로운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서학으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으나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한다는 교회법이 확정된 이후로는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음을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천주교(서학)가 그의 학문적 사상 체계 전환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을 이해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유교 경전을 공부해왔고 고위 관료에 오른 사람으로서 천주교를 배교했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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