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학 심학 실학-맹자와 순자를 통해 본 유학의 사유/김형효』를 읽고
故 김형효 교수의 강의를 직접 들은 적은 없으나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으로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1981년 대학가가 온통 민주화 운동으로 들썩일 때 김교수는 홀연히 서강대학교를 떠나 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기고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이 그의 행적에 또 하나의 관변 어용학자가 나왔다고 치부했던 것처럼 그당시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최근 들어 동양철학 관련 책 중에서 김교수의 책을 보게 되면서 그의 학문 활동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국내 동양철학자들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삼고 있지만 김형효 교수는 서양 철학을 바탕으로 중국 고대철학을 새롭게 분석한 점이 눈에 띄었다. 특히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기반으로 한 노자․장자 관련 연구서는 노장사상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큰 가르침을 준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중국 고대철학 관련 책들이 선학자들의 주석과 해석을 전달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독자로서는 새롭게 와닿는 점이 많지 않았다. 또한 시중 나온 책들 대부분이 제자백가 사상을 처세나 실용의 방편으로 읽히도록 취사선택하는 데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형효 교수의 『물학 심학 실학』 책은 공자ㆍ맹자ㆍ순자 등 유학 사상가들의 사유를 철저히 철학적으로 풀어쓴 책이다.
김교수는 서양의 철학․사회학․심리학 이론을 끌어들여 유학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물론 유학 사상의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 과거 선학자들의 주석과 현대 중국 철학 연구자들의 최신 연구 내용도 포함시켰다.
책은 공자 이후 유학의 계승자인 안자(안회) ․ 맹자 ․ 순자의 사상이 어떻게 구분되고 그들 사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려준다.
안자학(顔子學)은 송대의 정호에서 시작되어 육구연을 거쳐 명대의 왕수인의 학문으로 이어지고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 사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으면서 무위유학(無爲儒學)의 씨앗이 되었다.
맹자학(孟子學)은 증자적인 당위 유학의 전통을 기반으로 삼아 한대의 정치 유학을 거쳐 송대에 들어 정이의 도학과 주희의 종합적인 유학으로 맥락을 이어가면서 도학( 道學)의 도통이라는 중화주의 유학사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순자(荀子)의 사유는 논리적으로 명쾌하고 이성적이고 동시에 객관적이고 문제 해결적 관점에서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김교수는 “공자의 유학은 무위적 자연성, 당위적 도덕성 또는 종교성, 그리고 유위적 도구성의 여러 道를 다 함의하고 있는 복합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서 “공자가 밝힌 一以貫之의 道는 儒學의 세 영역을 관통하듯이 다 포괄하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설명한다.
책은 공자 이후 유학의 2대 사상가인 맹자와 순자의 사상을 성선과 선악, 천명과 천성. 도덕의 나라와 문화의 나라라는 키워드로 구분하여 심층적으로 비교 분석한다.
맹자의 사유는 철저히 비정치적이고 비사회과학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는 다른 차원에서 중시되어야 한다. 그 차원은 당위에 의한 도덕정치의 함유적 소유론보다 영혼의 종교적 존재론으로 초월하는 길이다
반면 순자의 사상은 철저히 외면적 사회성으로 일관되어 있다. 순자의 도덕은 내면적 영혼으로 올바른 양식을 말하지 않고 사람이 사회생활을 영위할 때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는 사회적 예의를 상징한다.
김교수는 맹자와 순자의 사유가 갖는 한계점에 대해 “순자의 철학은 유효한 행동을 사랑할 뿐이고, 맹자의 철학에는 유효한 실용성과 사회과학적 실천성이 희박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악을 제어한 절대선이 실현 불가능하다면 순자가 말한 것처럼 삶의 외형적 형식으로서의 인간을 예의 바르고 분수를 지키고 질서 속에서 친절하게 하는 것이 더욱 더 효율적이고 실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순자의 손을 슬쩍 들어준다.
김교수의 이러한 펑가는 평소 실용주의 철학을 중시하는 그의 지론과 일치한다.
김교수는 맹자와 주자를 추종했던 조선 유학자들의 폐쇄적인 사고가 갖는 문제점도 지적한다.
조선조 선비들이 비사회적이고 공상적인 맹자의 성선설을 정치의 요체로 삼게 된 이후 이념적 순수성을 놓고 흑백 논리가 대두되고 모든 것이 대립 개념으로 환원되면서 당쟁 발생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김교수는 그러한 폐해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을 언급한다.
한국의 유교문화가 중국이나 일본의 유교문화보다 훨씬 더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과정을 밟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유교문화가 너무 순수성의 이데올로기를 우상 숭배한 탓이다
지금의 한국문화도 조선시대의 그 흑백적 이분법의 극단성의 구조에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명분은 늘 그럴싸한 포장으로 덮었으나 실제의 속생각은 늘 사리사욕의 사심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김교수는 “조선조의 유교를 통하여 각인된 교조적 폐쇄성과 경직성은 공자의 사유에서 일탈한 딱딱한 표피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면서 “오늘 시점에서 공자의 철학적 읽기와 함께 유교의 진리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공자의 사유는 무엇보다도 세상과 인간을 하나의 시각으로서만 보기를 거부하고, 모든 것이 상황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불변적인 것은 이 세상과 인간이 늘 아슬아슬하게 저울처럼 균형을 잡아나가야 한다. 그것은 진리가 결국 시중( 時中)의 의미를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편으로 공자의 사유가 우리에게 주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어떤 철학적 진리의 고정된 정답이 없고 따라서 인간은 영원한 미제의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보다 더 구도(求道)의 공부에 더 알맞은 즐거움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공자의 유교는 자연적 사실성과 내면적 도덕성과 사회 정치적 현실성의 세 가지 진리의 양상들 사이에서 오가는 반복의 세상 보기를 가르치는 지혜로 여겨야 한다.
공자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의 뜻으로 굳어져서는 안 되고 그 세 가지를 언제나 다 살리는 균형을 유지하되 시대의 요구에 따라 그중에 어떤 것을 더 중시하는 시중지도(時中之道)를 겨냥한다. 공자의 사유는 결국 충서(忠恕)로 환원되지 않고 오히려 중용(中庸)이나 시중(時中)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김교수는 사상이 아닌 사유라는 개념으로 공자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상은 어떤 이념을 진리로 제시하나 사유는 어떠한 이념의 빛을 제시하기보다도 세상을 보는 마음의 눈을 정직하게 그린다. 공자의 사유가 밍밍한 것은 세상이 두꺼운 벽으로 칸막이처럼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여닫이가 가능한 문으로 나누어져 있어 문지방을 넘어 왕래가 가능한 구조에 다름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공자가 읽은 인간은 애매모호하다. 인간은 이 애매모험성이 싫어서 선명함을 반기나, 그 선명함이 다시 다시 외곬으로 기울 때 그는 다시 희미한 원초적 애매모호성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중용의 의미가 늘 거듭 되살아나는 것으로 보인다.
김교수는 “공자는 자유스러운 사상을 다양하게 펼친 물과 같은 사유의 소지자”라면서 “논어 읽기의 매력은 그러한 자연수의 물맛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설파한다.
논어는 어떤 경전( 經典)보다 그 읽기가 심심하고 자극이 없기에 주목이 가지 않지만, 그 싱거운 맛이 오히려 다양한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저작권자(c) 청원닷컴,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기사 제공자에게 드리는 광고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