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12코스(무릉 - 용수)

백재선 기자의 여행길 이야기

제주 올레 12코스(무릉 - 용수)

백재선 / 전임기자

거의 1년 만에 제주 올레길에 다시 나섰다. 제주에 내려와 사는 사촌 동생이 차량으로 데려다줘 12코스 시작점에 편안히 도착했다. 2년 반 전에 11코스를 마치고 모슬포로 돌아갈 때 버스가 아닌 카니발 차량 바닥에 겨우 몸을 실었던 적에 비해 격세지감이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6명이 함께 했는데 이번에는 혼자서 올레길을 걸어야 한다.


12코스는 『무릉생태학교』에서부터 시작한다. 생태학교는 폐교에 자리를 잡아 교실 건물과 운동장을 개조해 활용하고 있다. 시작점 스태프를 찍자마자 가랑비가 내렸다.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 입고 올레길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무릉 마을 입구 어귀에 4.3 위령비가 서 있다. 평화롭고 한적한 이곳에도 4.3의 아픈 흔적이 남아있다. 1948년 4.3 사건 당시 동네 청년 5명이 마을 입구 왕개 동산에서 희생되었는데 1959년 동년 청년 모임인 향상회에서 1959년 동산을 매입해 추모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당시 18세 이상 23세 향상회 청년 회원들이 어른들이 망설였던 일을 앞장서서 해냈다.

 

 

 

 

 

올레길은 좌기동 민가를 지나면서 민가 사이에 넓은 마늘밭을 만난다. 민가 돌담 사이 귤나무에는 큰 귤이 열려 있다. 어제 서귀포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에 큰 귤이 열린 귤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귤나무가 관상용으로 활용되는 것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길가 돌담 옆에는 보랏빛 들꽃이, 또 한쪽에는 붉은 선인장꽃이 도보객을 반겨주고 있었다. 붉은 동백꽃도 아직 지지 않고 피어 있었다.

 

 

 

 

 

민가를 지난 벌판 길을 한참 걷다가 올레길 안내 리본을 놓쳤다. 큰길을 따라가다가 농로 사이 샛길로 이어지는 올레길을 놓친 것이다. 지도 앱을 찾아보니 다행히 크게 벗어나지 않아 되돌아가지 않고 올레길을 만나는 도로를 향해 갔다.


마을 명지교회 앞에서 올레길을 만났다. 명지교회는 크지 않고 아담한 시골 동네 교회다. 누구라도 문을 열고 방문할 수 있는 동네 사랑방처럼 아늑해 보였다.

 

 

 

 

 

올레길은 계속 큰 들판으로 이어지고 들판에는 마늘ㆍ양파ㆍ무ㆍ보리 등 밭작물이 심겨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늘밭에서 마늘종을 쳐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들판 사이사이에는 묘역이 있었다. 여러 문중에서 들판 한가운데 조상 묘역을 조성했다. 탐라 건국 시조인 『고을방 왕후손 집안의 묘역』이라는 대형 안내석이 있어 눈에 들어왔다. 제주 사람들은 육지 사람들보다 조상 묘역을 더 정성스럽게 모시는 것 같았다. 밭에도 돌담, 무덤에도 돌담 검은 돌담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올레길은 도원 연못 옆길로 이어진다. 둑길로 올라서니 길 양쪽으로 연못이 보였다. 밭이 많은 이 지역에 큰 웅덩이를 파서 물을 보관해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들판에는 마늘밭이 대부분이지만 이따금 보리밭도 볼 수 있었다. 보리밭을 보면 어릴 때 보리 이삭을 구워 먹고 놀던 생각이 나 어느 작물보다 익숙해 반갑다. 바람이 불어 보리밭이 휘청거리는 모습은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물결치는 듯하다.

 

 

 

 

 

올레길은 녹남봉 오름으로 이어진다. 들판 사이 농로를 따라 오름으로 향했다. 예전에 녹나무가 많아 녹나무 오름이라 불렀는데 나무는 제주어로 “남”이라고 해 녹남봉 오름으로 표기하고 있다.

 

 

 

 

 

오름길 초입에 계단을 오르자 숲길이 나왔다. 완만한 숲길을 걸으니 전망대에 이르렀다. 녹남봉은 표고가 100m로 그리 높지 않지만, 전망대에 오르니 대정면 일대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 산방산과 모슬봉도 비구름에 가려 희미하게 보였다.

 

 

 

 

 

녹남봉에서 내려오니 너른 밭에 수확이 끝났지만, 양파가 널브러져 있다. 일전에 제주 토박이 아저씨한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제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나 동물들을 위해 밭작물을 다 수확하지 않고 일부를 남겨둔다는 아름다운 풍속을 지니고 있다.

 

 

 

 

 

도원리(신도리)라는 마을이 나왔고 민가 담벼락에 주황색 들꽃이 도보객을 맞아주었다. 민가를 지나 폐교 터를 가로질러 가니 12코스 중간점인 산경도예가 나왔다. 산경도예는 폐교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까지 하고 있다.

 

 

 

 

 

도원 마을에서 들판 길을 따라 거르니 이곳에도 여러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무릉리와 도원리는 이름 그대로 넉넉해 보였다. 지형이 비교적 평평한데다 땅이 기름지어 제주도 내 어느 지역보다 밭농사를 많이 하고 있다.

 

 

 

 

 

올레길은 해안으로 이어진다. 해안도로 한쪽에 『하멜 일행 남파희생자위령비』가 우뚝 서 있다. 1655년 하멜 일행이 승선한 페르레르호는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이곳 신도 2리 해안에 이르러 좌초되었다. 당시 승선자 중 목숨을 잃은 26명의 넋을 빌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2017년 위령비를 세웠다고 한다.

 

 

 

 

 

갑자기 하멜이 제주에 표착한 지역이 정확히 어딘지 궁금해졌다. 안덕면 용머리 해안에서도 하멜 표착지 기념관이 있다. 신도리 사람들은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익태가 쓴 지영록을 바탕으로 한라산과 녹남봉이 보이는 신도리 해안이 하멜 일행의 표착지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역사적 고증을 통해 하멜 일행의 표착지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령탑 옆 해변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소공원에는 방사탑과 소라와 돌고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공원 한쪽 도구리(돌로 된 큰 그릇)와 모살물 그리고 도원 마을 유래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올레길은 해안도로로 계속 이어지면서 신도 포구에 이르렀다. 신도 포구에는 제주의 여느 포구처럼 소형 선박 몇 척만이 정백해 있었다.

 

 

 

 

 

올레길은 해안도로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면서 민가와 들판 사이로 향했다. 가까이에 수월봉이 눈에 들어왔고 구름이 걷히면서 멀리 한라산까지 보였다.


수월봉에 오르는 길은 완만하고 짧았다. 숲길에서 벗어나자 바로 수월봉 육각 정자에 이르렀다. 수월봉 정상에서는 사방이 트여 전망이 뛰어나다. 내륙 안쪽으로 한라산에 이르는 넓은 들판과 앞바다에 떠 있는 차귀도가 눈에 들어왔다.

 

 

 

 

 

정자에서 쉴 틈 없이 수월봉에서 해변으로 내려오니 올레길은 해안가 지질 트레일 지역으로 이어진다. 해안가에서 보니 수월봉 일대는 오래전에 화산이 폭발할 때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분출물이 차곡차곡 쌓여 줄무늬를 이루고 있다.

 

 

 

 

 

수월봉은 1만8천 년 전에 화산이 분출하여 땅속에서 마그마가 솟아오르며 물을 만나 생성된 수성화산체로 지질학적 가치가 높아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월봉은 현재 1.5km 길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지만, 바다에 연한 화산체가 연안 조류와 해식 작용으로 계속 깎여 남은 지층은 폭발 당시 화산체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올레길은 엉알길을 따라 지구내 포구로 이어진다. 엉알은 큰 바위, 낭떠러지 아래라는 뜻으로 엉알길 절벽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층층이 화산쇄설암층을 이루고 있다. 절벽 아래 화산재 지층과 현무암 사이에는 이끼와 양서류 식물이 산재해 있어 태곳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엉알길 절벽 한가운데 일본군 갱도 진지가 볼썽사납게 조성되어 있다. 지질학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고 태곳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 시멘트 진지를 구축한 일본군의 만행에 치가 떨렸다.

 

 

 

 

 

일본군에 대한 분노는 바다에 오롯이 서 있는 차귀도를 보면서 삭일 수 있었다. 차귀도는 수월봉에서부터 도보객들의 친구이자 마스코트다. 적막한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차귀도는 홀로 걷는 도보객들에게 열심히 걸으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는 듯하다.

 

 

 

 

 

차귀도도 마그마 분출을 통해 형성된 수성화산체로 해수면의 상승과 파도의 침식 작용 여파로 계속 작아지고 있다고 한다. 1970년대 말까지 몇 가구가 차귀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현재는 제주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로 남아있다.


엉알길이 끝나자 자구내포구에 이른다. 자구내포구에는 어느 포구보다 많은 어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집어등을 매단 한치잡이 배도 여러 척 보였다.

 

 

 

 

 

올레길은 자구내포구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당산봉으로 이어지는 농로로 연결된다. 오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숲길이 나왔다. 당산봉은 높이 148m, 둘레 4.6 km의 비교적 큰 오름으로 옛날 산기슭에 뱀을 신으로 모신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올레길은 해안으로 인접한 능선길로 이어진다. 해안 절벽으로 이어지는 올레길은 차귀도와 함께해서 너무 좋았다. 지나가는 길에 차귀도의 모습이 계속 달라 보여 걸음마다 휴대폰을 꺼내어 찍지 않을 수 없었다.

 

 

 

 

 

당산봉 능선길은 올레길 1코스 후반에 성산 일출봉을 보고 걸으면서 느꼈던 감동을 되살리게 했다. 그 당시 올레길에서 성산 일출봉의 왼쪽과 오른쪽을 보면서 성산 일출봉의 달라진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당산봉 절벽 길에서 보는 차귀도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내 눈을 호사시켜 주었다.


해안 절벽 길은 『생이기정바당길』로 이어진다. 제주말로 생이는 새, 기정은 벼랑, 바당은 바다를 뜻한다. 생이기정바당길은 새가 사는 절벽 바닷길이라고 할 수 있다. 비가 온 뒤라 바다와 하늘색이 맑고 투명해 나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생이기정바당길』에서 차귀도가 바로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주위는 고요하고 적막한데다 일순간 편안함이 찾아 들어왔다. 그 편안함은 내가 주변의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일치감에서 오는 것 같았다.

 

 

 

 

 

나도 듬직한 차귀도, 녹색 산과 푸른 바다, 들판의 야생화 등 주변 자연과 어울려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위를 나는 새를 보자 일순간 나도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차귀도와 헤어지기 아쉽지만, 코스 완주를 위해 코스 종점인 용수포구로 갔다. 오늘 혼자서 걸었지만,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충만한 올레길이었다.


(2023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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